사이프러스의 기도
기록은 힘이 세다

산골 동네에 느닷없이 양수발전소가 들어섰다. 졸지에 실향민이 된 부모님은 고향을 뒤로 하고 서울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고향집을 지키면서 문중 일을 보는 것이 삶의 보람이었다. 조상의 일이라면 늘 발 벗고 나섰다. 나도 어릴 적부터 너희 13대 할아버지는 중종 때 무슨 무슨 벼슬을 하였고 너는 그 혈손이라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명절 때마다 그 할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진 불천위(不遷位) 사당에 데리고 갔다. 선비는 모름지기 공부하여 공직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할아버지에 대해 실감은 나지 않았다. 늘 이야기뿐이니 말이다. 그러다가 몇 해 전에 서울대 규장각에서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7)가 발견되었다. 그 할아버지가 30대 초반에 1518년 경상도 도사(都事)가 되어 경상감사를 수행하여 경상도 각지를 순력(巡歷)하면서 쓴 일기다. 감영(監營)에 관한 일을 기록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이라고 한다.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에서 탈초․번역되었다. 조상의 일인지라 우리 형제도 일부 비용을 부담하였다. 세상 일이 뜻대로 잘 안 될 때면, 나는 그 일기를 펴본다. 500년 전으로 돌아가 그 당시 경상도의 자연 풍광과 선비의 삶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이제 그 할아버지는 위패 속의 먼 조상이 아니라 나에게 친근한 인간으로 되살아났다. 일기를 통해 삶의 숨소리를 느낀다. 최근에 유명한 인권변호사인 홍성우 선생이 <인권변론 한 시대>를 펴냈다. 국가의 재판기록이 이미 폐기된 상황에서 그가 보관하고 있었던 귀중한 변론자료들이 없었다면 유신시대의 시국재판은 ‘역사의 법정’에서 다시 조명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난중일기>가 없었다면 이순신 제독은 지금처럼 역사의 영웅으로 추앙받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사마천이 죽음보다 더한 궁형(宮刑)의 치욕을 당하고도 살아남아 <사기>를 유장하게 썼던 이유도 결국은 철저한 기록정신 때문이다. 요즘 들어와 회고록이나 자서전이 많이 출간되어 다행이다. 지도자나 사회지도층이 소중한 자료와 기록을 남기고 ‘역사에 대한 증언’인 회고록을 쓰는 것은 후세를 위한 책무이자 ‘문화적 사명’에 속한다. 그 속에 담긴 지혜와 경험의 핵심을 배워 미래를 열어가는 것은 다시 후대의 몫이지만 말이다. <2011년 7월 25일자 매일경제>

 

 


7) <재영남일기>의 저자는 황사우(黃士祐 : 1486∼153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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